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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오 갈릴레이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하지 않았다.써먹기 좋은 정보/알아두면 좋은 상식 2017. 1. 9. 17:50728x90반응형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는 이탈리아의 천문학자이며 물리학자, 그리고 수학자입니다.
진자의 등시성 및 관성법측을 발견하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대한 지지 등의 업적을 남겼습니다. 지동설을 확립하려고 쓴 저서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2대 세계체계에 대한 대화>는 교황청에 의해 금서로 지정됐고, 이단 행위로 재판받았습니다.
이 재판에서 당시로서는 절대적이었던 교회의 권위에 굴복하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지동설을 주장한 자신의 주장을 철회했지만, 법정에서 나오면서 읊조렸다는 유명한 한 마디가 있습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하지만 이 유명한 말은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갈릴레이가 종교재판 끝에 그 말을 반항적으로 내뱉었다고 하는데, 그 소송 기록에도 그런 이야기가 없고, 그가 직접 쓴 편지와 글에도 없으며, 당시의 다른 기록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갈릴레이의 이 항변에 관한 최초의 언급은 그로부터 10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난 후에 프랑스 힌부 이라이유(Irailli)가 쓴, 부정확하기로 소문난 ‘문학 논쟁’(Querelles Litteraires)에 나옵니다.
이라이유가 그 말을 직접 지어냈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이 먼저 지어낸 것을 모방했을 것입니다. 갈리레이가 했다는 그 말이 아주 크게 인기를 끌게 된 것은 가톨릭 교회에 대한 적대감이 널리 퍼져있었던 탓도 있고, 교회의 반대자와 희생자를 진리의 순교자로 만들려는 노력에도 힘입은 바가 큽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가톨릭 교회의 희생자였을까요?
게르하우트 프라우제와 같은 역사가들의 말이 신방성이 있다면, 위대한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백 년 동안 믿어온 것과는 달리 가톨릭 교회의 불행한 희생자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종교재판소와 벌인 그의 유명한 언쟁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궤변으로 평가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의 제자들이 갈릴레이에게 붙여준 순교자라는 허울은 여러모로 갈릴레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철학자로 우주의 무한성과 지동설을 주장하고, 반교회적은 범신론을 논하다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했던, 갈릴레이보다 몇십 년 앞선 불행한 철학자 조르다노 브루노와는 달리 갈릴레이는 일생동안 나라와 교회의 권력자들과 아주 사이좋게 지냈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표현에 따르면 갈릴레이는 많은 고통을 받아야했지만 갈릴레이의 최대의 적은 속세의 동료, 즉, 대학 강단 위의 교수들이었지 교회설교단 위의 수도사들이 아니었습니다. 갈리레이가 50살이 넘은 나이에 비로소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게 된 것도 다른 물리학 교수들의 비웃음을 살까 두려워서였지, 교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에 반해 교회측은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토스카나 출신의 이 물리학 교수를 상당히 관대하게 대했습니다. 갈릴레이는 교황의 영접을 받았고, 예수회의 수사들인 예수회원들로부터 그의 학문적 업적으로 특별 대우를 받기까지 했습니다.
또한 예수회원들은 속세이ㅡ 학자들과는 달리 실재하는 사실을 통해( 즉, 목성의 위성을 통해)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관인 천동설이 과학적으로 맞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갈릴레이가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관을 틀린 이론이라고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이론이 유일하게 옳다고 주장했을 때에야 비로소 그에 대한 교회의 관대함이 진시하게 시험대 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갈릴레이의 논제를 연구 가설로 인정할 수는 있었어도 결정적인 진리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교회는 그들의 독점적인 지위가 침해당한다고 여겼습니다. 갈릴레이가 교회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증명된 진리라고 주장하면서도 그 증거를 내놓지 못하자 교회는 지구가 움직인다는 이론은 틀린 것이고 모든 점에서 신성한 교리에 어긋나는 것으로 선언함으로써 그들 나름대로 단호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갈릴레이가 증거를 내놓지 못한건 당연했습니다. 과학적 이론이란 것은 반증은 할 수 있어도 증명은 불가능한 것이니까요.
그렇지만 갈릴레이는 개인적으로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의 책이 금지되지도 않았고, 권력자들과 친분 관계도 별로 침해받지 않았습니다. 만약 이때부터 그가 자신의 논제가 이론에 불과하고 최후의 진리가 아니라고 말했다면 종교재판에 앞서 로마로 소환되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 로마로의 소환은 갈릴레이가 갖은 경고에도 불구하고 계속 절대적 진리에 대해 주장하는 내용의 새로운 책을 출판하면서 일어났습니다.
소환장은 1632년 10월에 보내졌고, 갈릴레이의 병으로 연기되어 1633년 2월에 비로소 갈릴레이는 로마로 향하게 됩니다. 로마에서 그는 처음에 피렌체 대공의 손님으로서 메디치 저택에서 지내다가, 1633년 4월 12일부터 6월 22일까지의 종교재판 소송 기간 동안은 바티칸 안에 있는 방 세개짜리 집에서 지냈는데 여기에는 하인과 정원이 내다보이는 전망까지 갖추어져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갈릴레이는 감옥에 갇히지지도 않았고 고문을 당하지도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종교재판 소송에서 그는 과학에 무지한 추기경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몇 가지 쟁점들을 해명하고 나면 집으로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절대적 진리에 대해 그의 책에 써놓은 것이 금지된 것이고 틀린 것이라는 교회의 생각을 반증할 과학적 논거를 종교재판관들에게 제시하지 못하게 되자, 그때에서 비로소 갈릴레이는 두려워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외부로부터의 강요나 압력을 받지 않고도 자신의 학설 전부를 간단히 부인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불복종 죄라는 판결이 내려졌고, 형벌은 3년동안 매주 일곱개의 참회시편에 금고형이 더해졌지만 갈릴레이는 감옥에 들어가지 않았고, 1642년에 나름대로 안락한 삶을 마쳤습니다.
결국 갈릴레이는 교회에 핍박받지도 않았고,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유명한 명언도 남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요즘으로 따지면 청문회장에서 우호적인 의원들로부터 사면해주기 위해 사전에 짜놓은 청문회를 거쳤다는 정도일까요?
역사는 이렇게 왜곡되어가는 걸까요?
어린 시절에 읽고 배웠던 상식들이 나이가 들어 조금씩 다른 것을 알아가면서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조금은 서글퍼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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